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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버클리를 발견하다 조지 버클리

 많은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다. 아니 종교적인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한국을 보면 불교도 숫자만 천만이 넘고 개신교도가 팔구백만 정도이니 모두 합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종교를 믿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것이다. 기성종교가 아니더라도 나름대로 비물질적인 어떤 것에 대한 희망섞인 막연한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비단 인간이 사후세계라던가 비물질적인 이상세계에 대한 희망이 만들어 낸 숫자일 뿐 아니라 우리모두가 가지고 있는 살아있음이라는 생생한 느낌이 유물론적 해법만으로는 도저히 설명될 수 없을 것이란 직감때문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들은 또한 과학적 결과들을 무척 신뢰한다. 과학이 기본적으로 극단적 형태의 유물론에 가장 적합한 (그리고 가장 강력한) 지적형식인데도 불구하고, 비물질적 세계에 대한 것 이상의 신뢰를 과학에 보내고 있다.

 그런데 실상 이 둘은 완전히 모순되는 세계관을 말하고 있음을 왜 그들은 눈치채지 못하고 있을까? 이미 수백년 전 데카르트가 물질적 뇌와 비물질적 마음을 연결하는 송과선이란 억지개념을 도입한 바 있다. 물리학적 입장에서 이 송과선이 존재한다면, 여기에는 인간의 의지에 따라 전자다발의 파동함수가 바뀌고 이것이 뉴런의 집단 발화에 직접적인영향을 준다는 것이 된다. 다시말하면 물질적인 전자의 위치가 내 비물질적 선택에 따라 바뀌어야한다. 그러나 이는 현대과학을 정면으로 부정하겠다는 선언이다. 실제로 누구도 이 송관선이나 그 대체물을 발견하지 못했고 그럴 희망도 별로 안 보인다. 물론 종교적인 기적을 이 부분에 도입한다면 문제는 해결되지만... 이 해법은 나한텐 불만족스럽다.

 결국 이런 문제를 -우리가 원하느 방향으로- 해결할 방법은 과학에서는 찾을 수 없다. 즉 과학적 실재론 또는 소박한 실재론을 받아들인다면 우리는 언제나 이원론의 한계에 부딛힐 수 밖에 없고 이는 모순을 잉태한다. 나머지 해법은 바로 조지 버클리가 제시한 바 있는데 그것은 바로 과학적 실재론을 거부하고 그 외적 대상을 관념으로 갈아엎는 것이다. 일종의 존재론에 있어서의 코페르니쿠스적 해법이라 할만 하다. 애초에 관념만을 실재하는 무엇으로 받아들인다면, 이원론의 모순도 해결할 수 있으며 유물론에 의해 좌절된 인간의 희망도 재건할 수 있다(더구나 우리는 생생한 경험이라는 과학으로 도저히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의 해법도 덤으로 얻게 된다). 여기에는 어떤 논리적 모순도, 어떤 과학결과와의 모순도, 어떤 거추장스럽고 복잡한 보조 명제들도 필요치 않다. 

조지 버클리의 관념론에 대한 훌륭한 해설을 아래에 옮긴다.

http://phil.snu.ac.kr/source/nongu/99-11.html 


조지
버클리: 물질의부인

조 원

1. 서론

버클리는 철학사적으로 그다지 많은 주목을 받고 있지 못하는 철학자다. 많은 경우에 버클리는 영국 경험론을 형성한 로크, 흄 등의 맥락 속에 위치지워지며, 특히 로크와의 연관 속에서 이해된다. 버클리를 이해하는 방식 중 하나는 (이것은 꽤 일반적인 경우인데) 로크에 대한 비판자로서 버클리를 이해하는 것이다. 이 해석은 일정한 측면에서 타당성을 보이는데, 버클리 자신의 생각이 많은 경우 로크를 염두에 두고 전개되었다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버클리는 로크와 많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다. 지각의 직접적인 대상은 오직 관념 뿐이라는 주장이 그 대표적인 예가 될 수 있다. 또한 버클리는, 로크와 마찬가지로 외적인 감각과 내적인 반성 작용을 통해 얻어진 경험이 인간 지식의 원천이 된다는 경험주의적 원리를 자신의 주된 원칙으로 삼고 있다. 그리고 로크에 의해 제기되었던 문제들, 즉 인간 지식의 가능성과 한계라든가 인간 오성의 구조와 원리를 해명하는 것이 자신의 철학의 목표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에 근거해 생각을 전개시켰던 로크와 달리 버클리는 자신의 신학적 믿음과 무신론 회의주의에 대한 반감, 상식에 대한 신뢰를 자기 철학의 시작으로 삼았다. 이러한 전제나 동기의 차이점으로 인해 버클리는 로크에 대한 비판을 거쳐서 '인간 지식의 원리'에 대한 전혀 새로운 견해를 내놓는다. 그것은 물질의 부인(이른바 비물질주의Immaterialism)과, 관념과 정신적 실체만이 존재한다는 관념론의 견해이다. 이런 점에서 버클리를 단순히 로크의 비판자로만 이해하는 것은 너무 일면적인 이해 방식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버클리가 가지는 현재적 의미는 무엇인가? 혹시 위의 평가들이 말하듯이 버클리는 로크의 비판자로서만, 아니면 근대 철학사 속에만 머무는 한 '기이한' 철학자정도의 의미밖에 지니지 못하는 것은 아닌가? 그럼 현재 버클리를 읽는다는 것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버클리는 스스로를 '상식의 옹호자'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자신의 철학이 상식적 견해를 가장 잘 설명해 줄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대중이나 다른 철학자들에게 버클리의 철학은 비상식적인 어떤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그렇다면 버클리의 기획, 즉 인간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인 견해를 품도록 만드는 오류들을 제거하겠다는 기획은 실패한 것이 아닌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한 예비적 대답을 위해, 이 글에서는 버클리의 {인간 지식의 원리에 대한 논고Treatise concerning the Principles of Human Knowledge}와 {하일라스와 필로누스 사이의 세 대화Three Dialogues between Hylas and Philonous}를 중심으로'비물질주의'가 주로 논의될 것이다. 버클리의 비물질주의는 외견 상으로는 매우 불합리하고 '비상식적인' 것으로 보이지만 버클리 자신의 논변은 그리 쉽게 논파될 수 없는 것이다. 따라서 이 글에서는 비물질주의에 대한 논변을 중심으로 비물질주의 논변이 어떻게 이해될 수 있으며 그에 따른 문제점을 버클리가 어떤 방식으로 해결하고 있는지를 살펴 보고자 한다. 그리고 버클리가 비록 로크의 비판자만은 아니다하더라도, 로크의 문제 의식과 개념들을 중심으로 버클리 자신의 생각을 진행하고 있기 때문에 로크의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에 대한 설명이 제시될 것이다.

2. 물질의부인

2.1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

버클리가 살았던 시대는 철학과 과학에 대한 전통적인 관점들이 붕괴되고 새로운 철학과 자연 과학관이 성립되어 안정화되던 시기였다. 이 시기에는 고대에 탄생해서 중세를 통해 더욱 확고해진 아리스토텔레스적인 자연관 세계관이 붕괴되고 '새로운 과학New science'들이 등장하여 새로운 세계상을 제시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러한 성과들은 17세기 말에 이르러 뉴턴에 의해 '근대 과학의 체계'라고 불릴만한 형태로 종합되었다.(김영식 등: p60-79)

뉴턴을 포함한 대부분의 근대 철학자들과 자연 과학자들은 미립자론 철학corpuscular philosophy을 통해 세계의 운동과 변화, 구조를 설명하고자 했다. 그렇다면 미립자론 철학이란 무엇인가?미립자론 철학에 의하면 세계는 무한히 넓은 진공 속에서 움직이는 미립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이러한 미립자들의 집합과 흩어짐, 운동에 의해 세계가 구성되며, 세계 안의 운동이 규정된다. 그러한 미립자는 신에 의해서 창조되어, 신이 정한 일정한 규칙에 따라 모이고 흩어지며 운동한다. 미립자들은 그 자체로서는 질량, 단단함solidity, 운동성, 파괴불가능 등의 성질만을 가진다. 또한 세계의 모든 것은 미립자들의 형태, 크기 질량, 운동과 미립자간의 상호 충돌에 의해서 설명될 수 있다. 하나의 미립자가 다른 미립자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상호 충돌뿐이다. 따라서 미립자론 철학은 역학적 설명만을 과학적인 설명으로 간주했고, 역학적 설명에 의해 세계의 모든 것을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로크는 이러한 미립자론 철학에 근거해 자신의 철학을 전개해 나가고 있다. 그의 지각 이론이나 물질 개념 등은 모두 이러한 미립자론 철학을 좀더 명료한 형태로 전개해 놓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로크의 미립자론 철학은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었는가? 다른 미립자론 철학자들(또는 과학자들)과 마찬가지로 로크는 세계의 기본적인 구성 요소를 미립자로 보았다. 로크에 의하면 물질적 세계는 본성과 작용에 있어서 기계적mechanical이며,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물체는 모두 미립자들의 집합체라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 미립자들 자체는 지각될 수 없으며 무수히 많은 미립자들이 모인 집합체만이 지각될 수 있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세계의 기본적 구성 요소인 미립자들은 단단함solidity, 크기, 형태, 위치, 운동성만을 가진다.

그렇다면 이런 미립자론 철학에서 본다면 인간이 사물(또는 외적 대상)을 지각하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사실 이런 문제는 사물의 기본적 구성 요소인 미립자가 그 자체로서는 지각되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발생하게 된다. 로크의 지각 이론에 의하면 인간의 지각은 감각 기관이, 외적 대상과 직접 접촉하거나 대상에서 방출된 보이지 않는 입자들과 간접적으로 접촉함으로써 이루어진다. 이것은, 한 사물이 다른 것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충돌, 즉 접촉에 의해서만 가능하다는 미립자론 철학의 주장을 반영하고 있는 설명이다. 이러한 기계적 자극은 신경을 통해 두뇌로 전달된다. 그런데 이 자극이 두뇌로 전달되는 순간 지금까지와는 다른 일이 생겨나는데, 이전까지의 기계적 과정이 두뇌에 이르러서는 비기계적인 결과, 즉 관념으로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마음이 직접적으로immediately 지각하게 되는 것은 외적 대상들이 아니라 그것에 의해 생겨나게 된 관념이다. 이러한 로크의 지각 이론은 보통 '표상론representational theory of perception'이라 불리는 것으로서 이 이론에 의하면 마음이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관념은 외적 대상을 표상하고 있다는 것이다. 표상론의 핵심 주장은 다음의 세 가지 주장으로 요약될 수 있다. 첫째, 마음의 직접적인 지각 대상은 관념이다. 즉 마음은 오직 관념만을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다. 둘째, 관념은 외적 대상의 표상이다. 즉 관념은 외적 대상과 일종의 상응 관계를 맺고 있다. 셋째, 마음은 외적 대상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는데, 그것은 외적 대상의 표상인 관념을 매개로 해서만 가능하다. 이러한 표상론은 데카르트에서 로크에 이르기까지 근대 철학자들과 과학자들에 의해 광범위하게 공유되었던 견해였다.

그런데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에 따른다면 세계는 이분화duplication된다. 즉 세계는, 우리가 지각할 수 있는 가진 사물들이 존재하는 세계와, 그것들의 원인이 되면서 그것들 자체로서는 결코 지각될 수 없는 미립자로 구성되는 세계로 나누어지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직접적으로 지각하는 세계와 실제적으로 존재하는 세계 사이의 괴리가 발생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괴리는 결코 인간의 유한한 능력으로는 뛰어넘을 수 없는 것이 된다. 현상과 실재가 구분되고 인간의 지각은 실재 그 자체에는 도달할 수 없으며 오직 현상의 매개를 통해서만 실재에 대한 지식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식이 타당한 것인지를 검증하기 위해서는 현상과 실재의 비교가 가능해야 하지만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에 의하면 그러한 비교는 근본적으로 불가능하다. 버클리가 가장 불합리하다고 여겼던 것은, 위와 같이 오류로 휩싸여 세계를 이분화하는 견해가 철학과 과학의 주된 원리로 채택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고 할 수 있다.

2.2. 감각적 사물과 지각

『원리』의 서두에서 버클리는, "인간 지식의 직접적인 대상이 감각에 의한 관념이거나 정념passion과 마음의 작용에 의한 관념, 또는 기억과 상상에 의해 형성된 관념이라는 사실은 자명한"(『원리』: 1절) 것이라고 말한다. 로크 등의 표상론자들과 마찬가지로 버클리 역시 지각의 직접적인 대상은 관념이라는 것을 인정하고 있다. 그리고 관념을, 그것이 생겨나는 종류에 따라 감각에 의한 것과 마음의 작용에 의한 것(로크에서는 '반성에 의한 것'), 기억과 상상에 의한 것으로 구분하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여러 가지 관념들이 서로 동반되어 나타나게 되면 그것들은 하나의 이름으로 불리게 되고 보통 하나의 사물one thing이라고 간주된다고 말한다. 예를 들어 특정한 맛과 향, 색, 형태와 단단함 등이 함께 관찰된다면 그것은 하나의 구분되는 사물로 간주되고 '사과'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된다는 것이다.

상상에 의해 형성되는 관념이나 정념, 생각 등에 대해서는 그것들이 마음 없이without mind 존재할 수 없다는 사실이 자명해 보인다. 그런데 버클리는 감각에 의한 관념들도 오직 마음 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런 주장의 정당화를 위해 버클리는 "감각적 사물sensible things에 대해 쓰였을 때 '존재한다'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가"(『원리』: 3절)라는 질문을 제기한다. 버클리에 의하면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지각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다esse is percipi", "또한 감각적 사물은 마음 또는 생각하는 것 밖에서는out of mind or thinking things 존재할 수 없다"(『원리』: 3절)

여기에서 버클리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주장을 정당화하는 논변은 비교적 단순하다. 버클리는 우선 지각의 직접적인 대상은 관념(또는 감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다. 이런 전제는 앞서 살펴보았듯이 로크를 포함한 표상론자들도 공유했던 전제이다. 이러한 전제 위에서 버클리는 감각적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이 무슨 의미인가에 대해 묻는다. 버클리에 의하면 감각적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그것이 지각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감각적 사물이란 원칙적으로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사물이고, 그 사물이 있는 것인지 없는 것인지를 확인하는 방법은 그것이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지 지각되지 않는지를 따져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지각된다는 사실과 무관하게 '감각적 사물이 존재한다'이라는 말이 유의미하게 쓰일 수는 없다. '감각적 사물'이라는 말 자체가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버클리는 지각된다는 것은 마음 속에 있는 것(또는 마음 밖에서는 있을 수 없다)이라는 주장을 펼친다. 이 주장은 앞서 전제되었던, 마음의 직접적인 지각 대상은 관념이라는 것과 관계가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이 직접적으로 지각할 수 있는 것은 관념일 수 밖에 없고, 관념은 마음 속에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의 논변을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은 형태로 나타낼 수 있을 것이다. 감각적 사물의 존재는 지각된다는 데 있다. 그런데 지각된다는 것은 그것이 마음 속에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지각의 직접적인 대상은 마음 속에 있는 관념들 외에는 없으므로) 따라서 감각적 사물의 존재는 마음 밖에서는 있을 수 없다. 여기에서 중요한 개념들을 추출해 그들 사이의 관계는 살펴봄으로써 버클리의 주장을 좀 더 자세히 살펴보기로 하자. 첫째 개념은 '감각적 사물의 존재'이다. 둘째 개념은 '지각됨being perceived'이다. 셋째 개념은 '마음 안에 있음', 또는 '마음 밖에서는 있을 수 없음'이다.

우선 첫 번째에서 두 번째로 넘어가는 과정을 살펴보기로 하자. 감각적 사물의 존재에서 지각됨으로 이행하는 과정은 우선 '감각적 사물'이라는 말 자체의 의미로부터 정당화될 수 있다. 즉 '감각적 사물'이라는 말이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것'이라는 의미를 가진 이상 '지각되지 않는 감각적 사물'이라는 말은 모순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버클리는 단순히 의미 분석의 차원에서 감각적 사물과 지각됨을 동일한 것으로 파악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감각적 사물의 존재와 그것들이 지각됨을 구분하는 것을 추상화의 일종으로 파악하고 있다.(『원리』: 5절) 사람은, 원래 모여있는 것이지만 흩어진 것으로 상상하거나(예를 들어 팔 다리가 없는 몸통) 어느 대상에서 하나의 성질만을 생각할(예를 들어 장미꽃이 없는 장미꽃 향기) 수 있다. 버클리는 이런 종류의 추상화는 가능하다고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버클리는 실제 존재나 지각을 뛰어넘는 추상화가 불가능하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따라서 감각이나 지각으로부터 구분되는 감각적 사물이나 대상을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어떠한 실제적인 감각이 없이 어떤 사물을 본다거나 느낀다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감각적 사물과 지각됨이 분리될 수 없는 것은 단순히 언어의 의미 분석 차원을 넘어서서 인간의 지각 능력이 가지는 고유한 원리에 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인간의 지각 능력에 있어서 감각적 사물은 지각되는 것으로서만 나타날 수 있는 것이다. 즉 인간의 사유 속에서 감각적 사물의 존재와 지각된다는 성질이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은 단순한 의미적 차원의 문제가 아니라 근본적으로 불가능한 문제가 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두 번째 개념에서 세 번째 개념으로 이행하는 과정의 정당화에 대해 살펴보자. 이 과정은 지각됨이 마음 안에 있음으로 이행하는 것이다. 지각되는 것은 곧 마음 안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인데 이것은 앞서 전제되었던, 마음의 직접적인 지각 대상은 관념이고 그 관념은 마음 안에 있다는 주장을 상기해보면 쉽게 해결된다. 지각되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관념일 수밖에 없고 (왜냐하면 마음의 직접적인 지각 대상은 오직 관념일 수밖에 없기 때문에) 그렇다면 그것, 즉 지각되는 것은 관념과 같은 성격을 가진 것, 즉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된다. 어떤 것이 지각되는 것이라는 성질을 가지고 있다는 주장이, 마음의 직접적인 지각 대상은 오직 관념이라는 주장과 합쳐진다면 지각되는 그 어떤 것은 마음 안에 있는 것이 된다. 즉 지각되는 것이 마음 밖에서는 어떤 존재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위와 같은 과정을 거쳐서 버클리는 감각적 사물의 존재는 지각되는 것이고 마음 안에 있는 것이라는 주장을 정당화시키고 있다.

2.3 물질 개념의 비판

마음의 직접적인 지각 대상은 관념이라는 주장과, 감각적 사물이 존재한다는 것은 지각된다는 것esse percipi이라는 주장을 통해 예비적 고찰을 진행시킨 후, 버클리는 본격적으로 물질 개념에 대한 비판을 시작한다. 버클리는 먼저 당시 통용되던 물질 개념을 기술하고 물질에 대한 그러한 규정들이 얼마나 불합리하고 모순적인가를 지적하는 방식으로 물질 개념을 비판한다.

물질은 불활성적이고inert감각이 없는senseless 실체substance이며, 그 안에 연장과 형태, 운동이 실제로actually 있다. (『원리』: 9절)

연장은 물질의 양태이거나 비본질적 성질accident이며, 물질은 그것[연장]을 떠받치는support 기체substratum라고 말해진다. (『원리』: 16절)

물질적 실체는, '일반적으로 있다'는 관념의 의미와 연관되어 있으며, '그것[물질적 실체]이 우연적 성질들을 떠받친다'는 개념notion과 관계되어 있다. (『원리』: 17절)

이러한 물질 개념의 규정에 대해 버클리는, 물질이 그 자체로서는 알려질 수 없는 것이어서 물질 그 자체에 대해 관념을 가지지는 못한다고 하더라도, 물질이 그것의 성질에 대해 무슨 관계를 갖는지는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물론 물질이 그것의 성질과 맺는 관계는, 물질이 성질들을 떠받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떠받친다'는 것은 무슨 의미인가? 분명히 여기에서 '떠받친다'는 것이 일상적인 의미로, 즉 '기둥이 지붕을 떠받친다'는 것과 같은 의미로 사용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떠받친다'는 것은 설명될 수 없는 개념이다. 또한, 보통 어떤 것과 다른 어떤 것 사이의 관계를 알기 위해서는, 문제의 대상들이 어떤 것들인지를 미리 알고 있어야 한다. 그러나 물질과 그것이 가진 성질 사이의 관계는 알려질 수 없다. 왜냐하면 '지각되지도 않고 알려지지도 않는' 물질이 무엇인지를 알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직 물질이 '떠받치는' 성질들만이 지각되고 알려질 수 있다. 그렇다면 알 수 없는 것과 알 수 있는 것 사이의 관계를 '떠받친다'라는 말로 설명하는 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 더구나 '떠받친다'는 말의 의미 또한 불분명하지 않은가? 버클리에 의하면 분명히 '떠받친다'라는 말은 무의미할 수밖에 없다.(와녹2: p102)

또한 버클리는 물질에 대한 규정이 모두 부정적인 용어로 이루어져 있다는 점을 지적한다. 즉 물질에 대한 규정은 모두 ' 이 아닌 것', ' 할 수 없는 것'이라는 표현으로만 이루어져 있다. 따라서 우리는 무엇이 물질이 아닌지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수 있고 알 수 있다. 그렇다면 "당신은, 그것이 좋아 보인다면, 다른 사람들이 '아무 것도 아님nothing'이라는 말을 쓰는 의미에서 '물질'이라는 말을 쓸 수도 있다. 그리고 당신의 말에서 그것들은 서로 바뀌어 쓰일 수 있다. 결국 이것은 내게는 그러한 정의의 결과로 보인다. 나는 나의 마음에 '아무 것도 아님'이라는 말에 의해 유발되는 것과는 다른 어떤 종류의 효과와 인상이 ['물질'이라는 말에 의해] 만들어지는지 알 수 없다."(『원리』: 80절) 버클리는 결과적으로 물질 개념이 아무런 의미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을 지적한다. 그 까닭은 첫째, 물질이 그 정의에 의해 지각될 수 없고 알 수도 없는 것으로 규정되었기 때문에 물질은 알 수 없는 것이고 따라서 '물질'이라는 말은 아무런 '효과'나 '인상'을 마음에 불러일으킬 수 없다. 둘째, 물질의 규정은 모두 부정어, 즉 ' 이 아니다'라는 형태로만 되어 있을 뿐 어떤 긍정적인 기술을 담고 있지 못하다. 따라서 '물질'이라는 말은 결국 ' 이 아닌 것'이라는 정보 외에 다른 의미를 주지 못한다. 물론 물질에 대한 규정 중에는 '성질들을 떠받치고 있는 것'이라는 적극적인 의미 규정이 있다. 그러나 앞서 지적되었듯이 '떠받친다'는 말의 의미 역시 매우 불분명하기 때문에 결국 물질은 부정적으로 정의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물질은 아무런 의미도 가지지 않는 개념이 되는 것이다. 즉 버클리는 물질 개념이 의미를 가지지 못하는 불필요한 개념이라는 점을 공격하는 것이다.

또한 물질 개념을 지지하는 입장에 의하면 물질이 실제로 가진 성질과 마음이 지각하는 성질 사이에는 괴리가 존재한다. 즉 물질이 실제로 가지는 성질은 1차 성질뿐이지만, 마음은 감각 기관의 한계로 인해 2차 성질까지 지각하게 된다. 더구나 마음은 2차 성질을 완전히 분리해낸(또는 추상화한) 1차 성질을 생각할 수 없다. 또한 1차 성질만이 분리되어 생각될 수 있다 하더라도, 로크 등에 의하면 1차 성질은 물질의 실제적 본질이 아니다. 즉 1차 성질 역시 미립자들의 구성물로서의 물질이 가지는 일종의 효과인 것이다. 따라서 물질에 대한 지식을 얻을 수는 없다. 물질에 대한 지식이 불가능하다면 물질이라는 개념이 가정될 수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세계에 대한 설명에 도움을 주지 못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물질 개념은 불필요하고 오히려 혼란만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요약하자면 버클리의 물질 개념에 대한 비판의 초점은 근대 미립자론 철학 및 표상론과 관련된 물질 개념에 맞추어지고 있다. 근대 미립자론 철학 및 표상론은 '불활성적이며, 마음으로부터 독립되어 있고, 그 자체로서는 지각될 수 없지만 관념의 원인이 되는 것'으로서 물질 개념을 규정하였다. 버클리가 비판하는 지점은, 물질이 마음 밖에 있으면서(마음과는 독립적으로 존재하면서) 마음의 직접적 지각 대상인 관념의 원인이 된다는 주장이다. 버클리는, 소리나 형태, 크기, 색 등의 관념이 지각되지 않은 채로 생각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명백한 모순이라고 반박한다. 즉 그에 의하면 모든 관념, 또는 지각의 대상은 마음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고, 따라서 소리, 형태 등의 관념이 마음 밖에 있는 물질(물질적 실체) 안에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앞서의 자명한 전제와 상충되는 것이다. 이런 점을 염두에 둔다면 버클리는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이 가지는 내재적인 한계를, 물질을 부인하는 극적인 형태로 전개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3. 물질개념비판이후

3.1 관념의 원인과 마음

로크가 '물질'이라는 개념을 도입하게 된 것은 일차적으로, 관념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로크는 마음 속에 있는 관념의 원인을 가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관념은 마음의 선호나 거리낌과 관계없이 발생하고 사라지며, 의지에 의해 통제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가 성질, 즉 관념만을 지각할 수 있다는 전제가 옳다면 그러한 성질을 '떠받치는' 무엇인가가 존재해야 한다. 그렇지 않고서는 우리의 의지와 관계없이 발생하고 사라지는 관념들을 설명할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로크는 물질 개념을 상정하는 것이 필수적인 것이라고 생각했다.(와녹2: 103) 다시 말해서 로크는 물질 개념을 통해 관념의 원인을 설명한 것이다.

그런데 버클리는 이와 같은 로크의 입장에 대해 크게 두 가지 방향에서 비판을 가한다.(와녹1: p18-20) 첫째, 물질 개념을 상정한다 하더라도 관념의 생성이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간단히 말해서 왜 미립자의 기계적인 미립자의 운동이 뇌를 거치면서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태를 일으키는지에 대한 설명이 부족하다는 것이다. (이때 전혀 다른 성격을 가진 사태란 물론 관념의 생성이다) 로크도 인정하듯이, 마음 속에 있는 관념과 뇌 속의 운동 사이의 가정된 관계는 전혀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미립자의 자극이나 뇌 속의 운동은 물질적인 것이지만, 마음 속의 관념은 정신적인 것이다. 그런데 이 두 가지 사태는, 정신과 물질이 본성상 다른 것이라는 심신 이원론을 지지하던 17세기 대부분의 철학자들의 입장에 의하면 전혀 다른 성격을 지닌 것이다. 따라서 물질 개념은 관념 생성에 대한 설명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한다.

둘째, 물질이 관념의 원인이 된다는 것은 잘못된 인과론를 함축하고 있다. 로크는 기계적 인과론mechanical causation의 입장에서 관념의 원인이 물질이라고 설명한다. 여기에서 기계적 인과론이란, 마치 당구대 위의 당구공 중 하나를 치면 그것이 굴러가서 다른 공을 움직이듯이, 진공 속의 미립자가 운동을 하다가 다른 미립자와 충돌하면 부딪친 다른 미립자가 운동하는 것을 인과성의 기본적인 형태로 생각하는 입장이다. 그런데 버클리는 여기에서 기계적 인과 관계란 부적당한 인과 관계라고 주장한다. 버클리에 의하면 진정한 원인은 어떤 것을 일으키고 어떤 것이 발생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진정한 원인의 예로는 마음의 의지 작용을 들 수 있다.그러나 기계적 인관 관계 속에서는 그러한 원인이 존재하지 않는다. 따라서 관념과 물질이 기계론적인 인과 관계를 맺고 있다는 주장은 불합리한 것이다.따라서 관념의 원인으로 물질 개념을 가정하는 것은, 관념 생성의 설명에 도움을 주지 못하는 불필요한 일이고, 인과 관계에 대한 잘못된 생각에 기반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 역시 "우리가 관념의 연속적인 연쇄continual succession of ideas를 지각하며, 어떤 것[관념]은 새로 생겨나고 다른 것은 변화하거나 완전히 사라지는 것을 지각한다"(『원리』: 26절)는 점에서 관념에는 원인이 있어야 한다고 인정한다. 그렇다면 관념의 원인으로서의 물질을 부인하는 버클리는 관념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인가? 앞서의 로크는 관념의 원인으로 (비록 지각될 수 없는 것이기는 하지만) 물질의 존재를 상정하고 그를 통해 관념 생성의 원인을 설명하고자 했다. 물질적 실체의 개념을 배제하는 버클리의 입장에서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있는 것은, 또 다른 관념과 정신적 실체, 둘 중의 하나일 수밖에 없다. 먼저 관념이 다른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있는가? 그런데 버클리에 의하면 관념은 수동적인 것이다. 관념과 정신은 그 수동성과 능동성에 의해 구분되는 것이다. 그러나 버클리의 인과론에 따르면 원인이 되는 것은 어떤 힘이나 능동성을 가지고 다른 것을 낳고 일어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관념은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없다. 그렇다면 '비물질적이고 능동적인 실체incorporeal, active substance, 즉 정신Spirit'만이 관념의 원인이 될 수 있다.

정신은 하나의 단순하고, 분할되지 않으며, 능동적인 존재one simple, undivided, active being이다. 그리고 그것은, 관념을 지각할 때는 '오성Understanding'으로, 관념을 산출하고 관념들에 대해 작용할 때는 '의지Will'라고 불린다. 마지막으로 정신은 세 번째 측면을 갖는데 그것은 실체Sustance 또는 존재Being이다.(이들은 '영혼Soul', '정신Spirit' 등으로도 불린다) 이것들은 앞의 두 힘, 즉 오성과 의지의 주체subject가 되고 그 힘들을 떠받치는 것에 대한 '상대적 개념relative notion'이다. 버클리에 의하면 위의 세 가지 힘, 즉 오성과 의지, 실체는 서로 다른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들은 모두 한 가지를 지시한다. 그런데 정신에 대한 관념은 형성되지 않는다. 왜냐하면 관념은 수동적이고 불활성적인 것이어서, 상image에 의해서든 유사성likeness에 의해서든, 능동적인 정신을 우리에게 드러낼represent unto us 수 없기 때문이다. 정신은 본성상 그 자체로서 지각되지 않고, 오직 그것이 낳는 효과affect에 의해서만 지각된다.

그런데 보통 '정신적 실체가 관념의 원인이다'라는 말은 '마음의 의지에 따라 관념이 이리저리 바뀔 수 있다'는 의미를 연상시킨다. 물론 버클리는, 기분 내키는 대로 마음 안에서 관념을 유발할excite 수 있으며, 의지에 따라 이러저러한 관념이 떠오르게 할 수 있다는 점을 인정한다. 마음이 능동적이라는 것은 이렇게 관념을 만들기도 하고 사라지게 하기도 하는 마음의 작용이 가능함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각에 의해 지각되는 관념들은 나의 의지에 의존적이지 않다. 버클리는 이런 점에서 감각에 의한 관념과 상상에 의한 관념을 구분한다.

감각에 의한 관념은 상상에 의한 관념(의지에 따라 만들어지고 사라지는 관념)과는 달리, (1)보다 강하고, 생생하고, 명료하다는 특성을 가지며 (2)안정성, 질서, 정합성, 임의적이지 않음의 특성을 가진다. 즉 버클리는 마음(또는 정신적 실체)이 관념의 원인이라고 해서 모든 관념이 의지에 의해 생성되고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버클리에 의하면 그 이유는 "그것들[감각에 의한 관념]을 생성하는 다른 의지나 정신[즉 신]이 있기"(『원리』: 28절) 때문이다. 이러한 버클리의 설명은 마음이 관념의 원인이 된다고 해서 결코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관념과 의지에 의하지 않는 관념 사이의 구분이 불가능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즉 더 강함, 생생함, 명료함 등과 안정성, 질서, 정합성, 비임의성 등의 특성을 통해 의지에 의해 만들어진 것이 아닌 관념을 구분해낼 수 있다는 것이다.

3.2 세계의 실재성

로크가 물질(또는 물질적 실체)이라는 개념을 도입하는 이유 중 하나는, 세계가 마음의 지각 작용과 관계없이 늘 항상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정당화하는 데 물질 개념이 도움이 된다는 것이었다. 로크는 세계의 실제적인 모습은 진공 속에서 운동하는 미립자에 의해 구성되며 물질은 그러한 미립자들이 모인 것이라는 미립자론 철학을 전제로 해서 세계가 실재하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미립자는 파괴되지 않고 창조 때 규정된 규칙에 따라 운동한다. 따라서 세계의 현상적 모습이 아무리 변한다 하더라도, 세계의 실제적인 모습은 미립자들의 구성물로서 그대로 남아 있으며 따라서 세계의 실재성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다. 그리고 감각에 의해 경험되는 세계는 이러한 미립자들의 세계에 대해 '의존적인' 실재성을 가진다.

여기에서 버클리의 반론이 시작된다. 세계가 아무리 미립자들의 구성물로서 실재성을 가진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알려질 수 없다면 그것은 무의미한 것이 아닌가라는 것이 버클리의 반문이다. 더구나 세계의 실재성이 보장되는 방식이 인간이 지각할 수도 없는 물질의 세계를 가정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라면 그런 성격의 실재성이 무슨 의미를 가질 수 있겠는가? 분명히 세계의 실재성이 문제가 되는 것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경험하고 있는 이 세계(로크에 의하면 실재적인 세계에 의존하는 감각적 세계)가 실재적인가 아닌가의 맥락에서이다. 따라서 로크가 물질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확보한 세계의 실재성 설명은, 전혀 엉뚱한 방식에서 세계가 실재적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이렇게 물질 개념을 통한 세계의 실재성 설명이 모순되고 무의미한 것이라면, 버클리는 세계의 실재성에 대한 다른 설명을 내놓아야 한다. 그리고 그 설명은 물론 '물질'이라는 개념을 매개로 진행되어서는 안된다.그런데 우선 지적되어야 할 것이 있다. 버클리가 부인한 것은 세계의 실재성이 아니라,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에 근거해 주장된 특수한 물질 개념이었다. 오히려 버클리는 물질에 대한 자신의 비판이 사물과 세계의 실재성을 설명하는 데 더 큰 도움을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오히려 버클리에게 실재성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모든 감각적 사물은 지금 지각되는 그대로 존재하는 것이고 '실제로' 존재하는 것이다. (마음의 직접적인 지각 대상은 관념이라는 점에서) 이러저러한 관념이 우리에게 직접적으로 지각되는 것, 즉 이러저러한 감각적 사물이 우리에게 지각되는 것은 의심할 바 없이 실재적이다. 따라서 버클리는 일상적인 용법으로만 제한되어 쓰인다면 '사물thing'이라는 말도 유의미하게 쓰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철학적인 맥락에서 그 단어는 물질적 실체와 관련된 의미를 가지기 때문에 유의미하게 사용될 수는 없다.

그런데 버클리의 주장처럼 '지각되는 관념'만이 실재하는 것이라면 문제가 발생하지 않는가? 유니콘이나 그리핀같은 것들에 대해서도 우리는 관념을 가질 수 있다. 그렇다면 이런 것들도 실재하는 것이란 말인가? 물론 버클리는 그것들이 '실재하는 사물'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렇다면 실제적 사물을 구분하는 기준은 무엇인가? 표상론이나 상식적인 견해에 의하면 의자나 책상의 관념과 유니콘 등의 관념을 구분하는 기준은 그것이 외적 대상으로서 실재하는 것을 가리키는가 아닌가였다. 반면에 버클리에 의하면 '실제적인 사물'과 '상상적인 관념' 사이의 구분 기준은, 그것에 대응되는 외적 대상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념이 가지는 특성에 있다. 다시 말해서 어떤 관념이 실제적 사물에 대한 것(버클리의 표현에 따른다면 '감각에 의한 관념')인가 아닌가는 그것이 더 생생함과 더 강함, 더 질서있음, 더 정합적임을 얼마만큼 가졌는가에 의해 결정된다. 다시 말해서 생생함, 강함, 질서있음, 정합성 등이 감각에 의한 관념과 상상에 의함 관념(마음의 산물)을 구분하는 기준이 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로크와 버클리의 차이를 좀더 넓게 해석한다면, 로크는 지식의 타당성에 대한 판단 기준을 경험 너머에 있는 '어떤 것', 즉 물질에서 구한 반면, 버클리는 기준을 경험될 수 있는 영역에서 구하고자 했다는 것으로 정리될 수 있을 것이다. 버클리는 세계에 대한 지식은 인간이 경험할 수 있는 영역 안에서 발견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감각에 의한 관념과 상상에 의한 관념 사이의 구분 기준을 제시하는 데서 보이듯이 버클리는 주어지는 세계의 질서에 내재(內在)하는 성질을 관찰하고 조사함으로써 인간의 지식이 성립 가능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그렇게 성립된 지식은 바로 세계에 대한 올바르고 타당한 지식이라는 것이다.이런 점에서 버클리는 인간 지식의 가능성에 대해 낙관적인 태도를 취한다. 우리가 우리의 경험을 주의 깊게 관찰하고 우리의 사유를 살펴본다면 세계의 대한 지식은 온전한 형태로 주어질 수 있다. 그리고 그 지식의 타당성은 인간 자신의 경험 안에서 보장되는 것이지 결코 경험 밖에 존재하는 어떤 숨겨진 원리나 질서에 의해 보장되는 것이 아니다. 이런 점에서 물질을 부인하는 버클리의 입장은 역설적으로 그 누구보다도 '실재론적'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는, 세계는 온전하게 경험의 영역에 드러나고 있으며, 따라서 세계와 자연에 대한 인간 지식은 온전한 형태로 가능하다는 전혀 새로운 설명을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4. 결론

지금까지 버클리의 생각을, 물질 개념에 대한 부인을 중심으로 살펴 보았다. 또한 로크가 버클리에 미친 영향은 무시할 수 없으며, 버클리가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키며 염두에 두었던 철학자가 로크였기 때문에 로크의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에 대해서도 살펴보았다. 버클리는 주로 자신에 앞서 전개되었던 철학들의 핵심적인 개념을 비판함으로써 자신의 생각을 전개시켜 나갔다. 버클리는, 물질 등의 개념을 목표로 해서 그것들이 내적인 모순을 가지고 있으며 그 개념들로부터 불합리한 결론이 도출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을 통해 자신의 입장을 제시하는 방법을 택했던 것이다.

앞서 설명되었듯이 로크 등의 미립자론 철학과 표상론에 의하면 세계는 지각되지 않는 '진정한' 세계와 지각되는 경험 세계로 이분화된다. 버클리가 물질을 부인하는 기본적인 의도는, 경험되는 세계와 '진정한' 세계 사이의 균열을 다시 통합하고자 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지각되지만 실제적이지 못한 세계와 지각되지 않지만 실제적인 세계를 하나로 합치고자 하는 것이 버클리의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버클리는 자신이 제시한 원리, 즉 물질의 부인과 존재하는 것은 지각되는 것이라는 원리가 수용된다면 세계는 우리에게 그 모습 그대로 주어질 수 있는 것으로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했다. 버클리에 의하면 경험적 영역 너머에 존재하면서 경험적 영역을 규정하는 물질의 세계는 없다.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가 바로 실제적인 세계이고 세계의 전체 모습 그대로이다. 인간의 능력은 세계를 그 자체의 모습 그대로 파악할 수 있다. 반면에 물질이라는 개념을 상정한 로크는 세계의 진정한 질서는 인간에 의해 파악될 수 없다는 회의주의적 요소를 가지게 되었다. 따라서 물질은 세계의 모습을 파악하는 데 오히려 방해가 되며 불필요한 개념이다. 그렇다면 버클리가 물질의 존재를 부인하는 것은 세계의 질서와 인간 사이에 놓인 '막'을 제거한 것과 같은 의미를 가진다. 즉 물질의 부인을 통해서 버클리는 세계를 알 수 있는 것으로 규정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물질이 부인되는 순간, 인간의 경험 너머에 존재하면서 경험 세계를 규정하지만 지각되지는 않는 세계는 사라진다. 경험적 세계의 질서는 우리가 경험하는 세계의 안에 있다. 다시 말해 버클리 철학은 당대에 특수하게 규정되었던 물질 개념을 부인함으로써, 구체성의 추구와 경험적 세계의 실재성을 강조한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버클리는 물질 비판의 주요 근거를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구하고 있다. 다시 말해 물질이 인식론적으로 지각될 수 없는 것이므로, 존재론적으로 있을 수 없는 것이라는 결론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버클리에게는, 인식론적으로 인식 불가능한 것은 존재론적으로도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버클리의 주장은 존재하는 것이 어떤 것인가라는 존재론적인 질문과 맞물리게 마련이다. 즉 존재하는 것의 조건이 인식될 수 있는 것이어야 한다는 주장에는 나름대로의 정당화가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정당화는 존재론적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물론 존재론에 대해서 버클리는 정신적 실체와 관념만이 존재하는 것의 모두라는 관념론을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적 실체, 즉 마음과 관념 사이의 관계는 어떤 것인가, 그리고 인식될 수 있는 것만이 존재한다면 정신적 실체는 어떻게 인식될 수 있는가 등의 질문이 버클리에 대해 제기될 수 있다. 따라서 버클리의 물질 부인에 대한 완전한 이해를 위해서는 버클리의 존재론, 즉 관념론에 대한 탐구가 요청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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