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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토로그 마이가든




아인슈타인의 늦둥이? 사회

에블린 아인슈타인은 아인슈타인의 첫째 아들 한스가 입양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에블린 본인은 자신이 아인슈타인의 딸이라고 믿고 있다고 한다. 아인슈타인이 뉴욕에 있는 어느 댄서와의 관계에서 자신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녀 말이 맞다면, 그녀는 1941년생이기 때문에 아인슈타인이 예순이 넘어서 그녀를 가졌다는 것이 되는데... 아인슈타인의 바람기와 첫째 딸 리제를에 관련된 의혹들그리고 무엇보다 에블린 그녀의 그 독특한 코! 생각한다면 믿지 못할 이유도 없을것 같다 ^^.

 

한스의 차남 폴 아인슈타인은, 아인슈타인의 바이올린을 물려받았는데, 작곡가겸 바이올리니스트로 프랑스에서 활약했다 한다 .

 

참고자료:http://wiki.answers.com/Q/Does_Albert_Einstein_have_any_living_grandchildren


박테리아의 이타성

http://radar.ndsl.kr/radDetail.do?cn=GTB2010090132

 

요약

: 항생제에 내성을 갖는 박테리아 군집을 형성시킴.각 박테리아들의 항생력을 측정하였으나, 놀랍게도 소수의 슈퍼박테리아가 갖는 항생제 내성(및 증식력)을 대다수의 박테리아는 갖고 있지 않았음.

 

지속적인- 그러나 치명적이지는 않은 - 스트레스 상황에서 유전적 돌연변이를 통해 탄생한, 슈퍼박테리아는 인돌분자를 분비하게 되는데, 이 분자는 내성을 갖지 못한 박테리아가 항생제를 세포밖으로 밀어내는 '배출 펌프'의 기능을 향상시킴. 슈퍼박테리아는 에너지 소모가 자신을 위협할 수도 있는데도 불고하고 이와같은 '이타적' 행동을 한다는 사실.

 

 이와같은 이타적 전략은, 무능한 개체가 도태되고 슈퍼박테리아가 집단의 중심세력으로 확대되는데 까지 걸리는 시간을 단축시킬 수 있으며 집단 수준의 유전적 다양성을 보존할 수있어, 장기적으로 집단의 생존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함.

 

ps.이젠 '이런 단세포같은 XX'라고 욕하지 맙시다... 박테리아도 그들의 동료의 필요를 이해?하고 있고, 또 그것을 실천하고 있었다니!!


데이빗 차머스, 좀비, 버클리, 관념론

이전에 뉴런의 발화와 우리의 일인칭 '경험'을 일치시키는 것에 대한 불만족감을 유물론을 버린 논거로 사용하였다.
데이빗 차머스는 concievable argument를 통해 일인칭 경험이 없는 좀비를 상상할 수 있다는 것으로 물질주의(유물론)의 한계로 지적하였다.
물론 또 다시 그의 지적대로, 직관에 어긋난다고 해서 진실이 아닌 것은 아니다(현대물리학의 발전과정에서 우리는 실제로 자연이 우리의 직관에서 많이 벗어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였다) 하지만 직관에 어긋나는 진실을 받아들이려면 그만큼 강력한 논거가 필요하다. 하지만 좀비에 관한 이 concievable argument는 그게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라 실제로는 누구도 풀지 못한 '어려운 문제'임을 보여줬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이원론적 모든 주장(데이빗 차머스가 이름붙인 type D, E dualism)은 그 자체로 문제를 복잡하게 만들뿐 아니라 마음-물질 상호작용이라는 난감한 문제 때문에 논리정연하고 말끔한 문제해결을 어렵게 만든다. 라이프니츠가 단자론에서 신과 뉴턴과학간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 자체로 완전무결한 (창이 없는) 단자를 가정했듯, 애초에 상호독립적인 몸과 마음의 일종의 병행을 가정한다면 문제는 사라지겠지만 여전히 매우 불만족스럽다.

결국 문제를 가장 단순화시키고 어떤 이원론의 문제도 남기지 않고, 데이빗 차머스의 문제제기도 피해갈 수 있는 존재론은 조지 버클리류의 주관적 관념론밖에 없다.

데이비드 차머스의 좀비논변에 대한 생각 조지 버클리

제가 지금까지 데이비드 차머스의 글을 읽으면서, 그의 깔끔한 논리에 호감을 느끼긴 했습니다. 특히 zombie논변은 재미가 있지요. 우리와 같은 기능을 수행하나, 즉 기능주의적으로 구별불가능하나,  '경험'하지는 못하는 좀비를 가정하고, 이 좀비가 가능하다면, 우리의 세계는 물리적인 것만으로는 모두 설명될 수 없다는 논리입니다. 그러면서도 그는 세계는 기본적으로 물리적으로 닫혀있다고 말합니다. 즉 인간의 모든 행위는 -잠정적이나마-과학과 모순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죠. 이것으로부터 그가 부수현상론자(type-E dualism, 의식이 일종의 극장의 관객으로 보는 입장. 관객은 영화의 편집에 참여하지 못하죠)이거나 type-F 일원론자(의식을 물리적 법칙의 기본법칙의 하나로 간주)인 것을 알 수 있어요.
 사실 여기에 이르면 이런 의문을 가질 수 있습니다. 만일 세계가 물리적으로 닫혀있다면, 우리는 어떻게 우리가 '경험'한다는 것을 알 수 있을까요? 만일 차머스의 말대로 물리적이지 않은 무엇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우리의 1인칭 '경험'이 이에 대한 근거라면, 이 비물리적 지식이 어떻게 우리의 물리적 뇌속에 개념화될 수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언듯 차머스가 부정하는 데카르트식 이원론(type-D 이원론의 일종)으로 우리를 이끄는듯 합니다. 그런데도 세계가 물리적으로 닫혀있다고 말하는 것은 그 자체로서 모순이 아닐까요?
물론 만일 물리적으로 우리와 완벽히 동일한 좀비를 상상한다면, 그 좀비조차 우리와 같은 물음을 품어야만 합니다. 우리가 물리적으로 닫혀있지만, 우리가 '우리는 왜 주관적인 경험을 하는가'라고 묻는다면, 좀비 역시 동일한 물음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즉 차머스에 의하면 비물리적일것이 분명한 우리의 이 지식조차 물리적 세계에 닫혀있습니다) 그렇지만 여전히 차머스의 논지에 따르면 우리는 여전히 기능적으로 구별할 수 없지만 '경험'은 하지 않는 좀비를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이 그의 논지가 쉽게 반박될 수 없는 이유이고, 철학이 어려운 이유입니다.
아인슈타인은 '가장 이해하기 어려운 것은 우리가 자연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라는 말을 했다 합니다. 이에 대해 과학자라면 이런 대답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진화를 통해 습득된 인과율에 대한 확고한 심상, 그리고 이 심상이 이 논리가 미시시계에서도 까마득한 거시세계에서도 '우연하게도' 적용되었기 때문이다!라고. 물리적으로 닫혀있어여 할 차머스의 '경험함' 역시 이런 기막한 우연의 하나일까요?

의식에 관한 어려운?문제

"의식적 경험의 수수께끼" (The Puzzle of Conscious Experience)


데이빗 제이. 차머스 (David J. Chalmers)

[마침내, 신경과학자들을 필두로 많은 학자들이 가장 심원한 존재의 신비를 파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두뇌에 관한 지식만으로는 아무도 그 수수께끼의 끝에 다가서지 못하리라]


의식적 경험은 세상에서 가장 낯익은 것이면서 동시에 가장 신비로운 것이다. 우리가 의식보다 더 생생하게 곧바로(직접적으로) 알게 되는 것이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의식을 우리가 아는 그밖의 모든 것과 일치시키기란 지극히 어려운 일이다. 의식은 왜 존재하는가? 의식은 무엇을 하는가? 도대체 어떻게 해서 의식이 두뇌의 신경작용(neural processes)으로부터 발생하는 것일까? 이러한 물음들은 모든 과학을 통틀어 가장 매혹적인 물음에 속한다.


객관적인 관점에서 보면, 두뇌는 비교적 파악이 가능하다. 당신이 이 컴퓨터 화면을 들여다 볼 때, 휘익하고 지나가는 처리과정이 있다. 광자들이 당신의 망막을 때리고, 전기적 신호가 당신의 시신경을 통과해, 두뇌의 여러 부위 사이를 돌아다니고 나면, 마침내 당신은 웃음을 짓거나, 당황스러워 얼굴을 찌푸리거나, 아니면 뭐라고 말을 할 것이다.


그러나 거기엔 또한 주관적인 측면이 있다. 당신이 컴퓨터 화면을 볼 때, 당신은 그것을 의식하며 곧바로 그 영상(이미지)과 글자들을 당신의 개인적이고 심적인(mental) 삶으로서 경험하게 된다. 당신은 화면에 나타난 형형색색의 꽃송이들과 짙푸른 하늘을 보고 생생한 인상을 받는다. 동시에, 당신은 어떤 감정을 느끼게 되고 어떤 생각을 하게 된다. 이러한 경험들이 모여 의식을 얼개짓는다(구성한다). 이러한 의식이 바로 주관적인 마음의 내적 삶(inner life of the mind)이다.


오랜 동안, 의식은 두뇌와 마음을 연구하는 학자들의 기피 대상이었다. 객관성에 바탕을 둔 과학이란 의식과 같이 주관적인 대상을 적절하게 다룰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지난 세기(20세기) 초를 지배했던 심리학의 행동주의적 경향은 외적인 행동만을 집중 조명하고, 내적인 심적 과정에 대한 언급 자체를 허용치 않았다. 그 뒤, 인지과학이 생겨나면서부터 머릿속에서 일어나는 처리과정에 주의를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의식은 여전히 금지구역에 남은 채, 단지 밤 늦게 한 잔 걸치며 거론하고 마는 주제에 불과했다.


그러나 지난 수년 동안에 걸쳐, 점점 늘어나는 많은 수의 신경과학자, 심리학자, 그리고 철학자 들이 의식은 연구 불가능하다는 고정관념을 깨뜨리며 그 비밀을 파헤쳐 나가기 시작했다. 흔히 예상할 수 있듯이 이제 막 생겨나는 분야에서는 다양하면서도 뒤죽박죽 상충하는 이론들이 난무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기본 개념들을 서로 모순되게 사용하는 경우가 빈발한다. 따라서 이런 혼란스러움을 풀기 위해서는 철학적 추론이 필수적이다.


관련 학계 내의 수많은 견해를 살펴보면, 의식은 신경과학과 심리학의 표준방법으로써 충분히 설명이 가능하다고 보는 환원주의적 이론(reductionist theories)에서부터, 우리는 결코 의식을 규명하지 못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이른바 신비주의자의 입장까지 그 범위가 매우 넓다. 그러나 내가 믿는 바는, 면밀한 분석을 거치고 나면 이 두 견해는 오류로 밝혀질 것이며, 진리는 그 중간 어딘가에 자리잡고 있으리라는 것이다.


나는 환원주의(reductionism)를 논박하겠다. 즉 비록 신경과학이 다양한 설명을 제공하겠지마는, 신경과학의 이론 도구를 가지고는 의식 경험을 완전하게 설명할 수 없다고 논증할 것이다. 나는 또한 신비주의(mysterianism)를 논박하겠다. 다시 말해 의식은 새로운 종류의 이론으로써 웬만큼 설명이 가능하리라고 주장하겠다. 하지만 그러한 이론을 상세히 제시하기에는 아직 갈 길이 멀다.


그러나 사려깊게 추론하고 한층 정교하게 추리하면 그 전체적 특성을 어느 정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예를 들면, 그 이론은 새로운 근본 법칙을 포함할 것이다. 그리고 정보 개념이 중심적 역할을 맡을 것이다. 이러한 어렴풋한 일별만으로도, 새로운 의식 이론이 우주와 우리 자신에 대한 우리의 견해에 놀라운 결과를 안겨주리라는 점을 예감할 수 있다.


어려운 문제 (The Hard Problem)


연구자들은 "의식"(consciousness)이라는 용어를 매우 다양한 의미로 사용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먼저 논점을 명료하게 드러내기 위해, 의식이라는 이름 아래 종종 한데 뭉뚱그려지는 문제들을 세분할 필요가 있다. 이 작업을 위해서는, 나는 "쉬운 문제"(easy problem)와 "어려운 문제"(hard problem)를 구별하는 것이 썩 유용하다고 생각한다. 쉬운 문제라고 해서 결코 하찮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쉬운 문제는 실제로 심리학과 생물학에서 가장 도전적인 문제다. 그러나 이 문제에는 신비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는 "어려운 문제"가 따라붙는다.


의식의 "쉬운 문제"에는 다음과 같은 문제들이 포함된다. 과연 어떻게 해서 인간 주체는 감각적 자극을 구별하고 그에 적절히 반응할 수 있는 것일까? 과연 어떻게 해서 두뇌는 다양한 출처로부터 들어오는 정보를 통합 처리하고, 그 정보를 적절히 사용하여, 행동을 조절하는 것일까? 대체 어떻게 해서 인간 주체는 자신의 내적 상태를 말로 표현해낼 수 있는 것일까? 비록 이 모든 물음이 의식과 밀접하게 결합되어 있지만, 그에 앞서 그것들은 모두 인지 체계의 객관적 구조에 관련되어 있다. 따라서 우리가 인지심리학과 신경과학을 통해 끊임없이 연구해 나간다면 "쉬운 문제"에 대한 답을 구하게 되리라고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반면에,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해서 두뇌의 물리적 작용이 주관적 경험을 일으키는가 하는 문제다. 이 수수께끼에는 사고(thought)와 지각(perception)의 내적 측면이 포함된다. 다시 말해 주체가 사물이나 사태를 느끼는 방식을 말한다. 예컨대 우리가 볼(see) 때, 우리는 생생한 푸른 색 감각과 같은 시각적 감각(visual sensations)을 경험한다. 혹은 멀리서 아득히 들려오는 피리 소리의 형언키 어려운 선율을 생각해 보라. 강렬하게 쑤셔오는 통증이나 샘솟는 행복감 혹은 생각에 완전 몰입한 순간의 무상무념적인 질감을 생각해 보라. 이 모든 것이 내가 의식이라고 부른 것의 한 부분을 이룬다. 즉 진짜로 마음의 신비를 불러일으키는 것은 바로 이러한 현상들인 것이다.


그 특징을 예시하기 위해, 호주의 철학자인 프랭크 잭슨(Frank Jackson)이 고안한 한 사고실험을 살펴보자. 23세기에 사는 미래의 신경과학자 매리(Mary)는 색 시각(color vision)을 담당하는 두뇌 작용에 관한 한 세계 최고의 전문가다. 그러나 매리는 평생을 흑백의 방 안에서만 살아왔다. 그 때문에 다른 색깔들은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다. 이 여성 과학자는 두뇌에서 일어나는 물리적 작용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 다시 말해 그 생물학과 구조와 기능 따위를 모두 알고 있다. 이 여성 과학자는 그러한 지식을 갖추었기 때문에 쉬운 문제(easy problem)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파악하고 있는 것이다.


즉 어떻게 해서 두뇌는 자극들을 구별하고, 정보를 통합하며, 말로 표현해낼 수 있도록 하는가에 대해 완전하게 파악하고 있다. 매리는 색 시각에 관한 지식으로부터 어떻게 색깔 이름이 빛의 분광(light spectrum) 상에 나타나는 파장과 일치하는지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아직도 매리가 전혀 알지 못하는 색 시각에 관한 결정적인 사항이 여전히 남아 있다. "빨간 색과 같은 색깔을 경험한다는(본다는) 것은 과연 어떠한 것(느낌)인가"가 바로 그것이다. 따라서 두뇌의 기능에 관한 물리적 사실만으로는 전혀 이끌어낼 수 없는 의식적 경험에 관한 사실이 여전히 남아 있다는 결론이 나온다.


과연, 왜 이같은 물리적 작용이 의식적 경험에 동반하는지 그 아무도 전혀 알지를 못한다. 우리의 두뇌가 어떤 파장의 빛을 처리할 때, 어떻게 해서 우리는 자줏빛 색깔을 경험하게 되는 것일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우리는 그런 경험을 하게 되는가? 과연 의식이 없는 자동인형(automaton; 자동기계)은 이와 똑같은 과제를 수행해낼 수 없는 것일까? 바로 이러한 물음들이 우리가 의식 이론에서 대답해야 할 흥미진진한 문제들인 것이다.


신경과학은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Is Neuroscience Enough?)


나는 의식이 두뇌에서 생긴다는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다. 예컨대, 주관적인 시각 경험이 시각 피질에서 발생하는 처리과정(processes; 작용)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안다. 하지만, 이 연결(link) 자체가 알 수 없는 의문을 불러일으킨다. 분명해 보이는 사실은, 주관적 경험은 물리적 작용으로부터 창발하는 것 같다는 점이다. 그러나 우리가 전혀 모르는 것이 있으니, 그것은 바로 주관적 경험이 어떤 방식(how)으로 어떤 원인(why) 때문에 생겨나느냐 하는 점이다(주관적 경험은 어떻게, 왜 생기는 것일까).


최근 신경과학과 심리학에서 의식에 관한 연구가 봇물을 이루는 것을 보면, 이 신비가 점차 선명하게 밝혀지기 시작했다고 기대를 품을 만하다. 그러나 좀더 면밀히 살펴보면, 거의 모든 오늘날의 연구가 단지 의식의 "쉬운 문제"만을 설명하고 있음이 드러난다. 환원주의자의 확신에 찬 견해는 바로 이 쉬운 문제에 대한 과학적 성과에서 나온다. 그러나 이런 성과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어려운 문제가 관련된 영역에는 아무런 빛을 던져주지 못한다.


신경과학자 프랜시스 크릭[Francis Crick: 솔크 생물학 연구소(Salk Institute for Biological Studies), 샌디 에이고 소재]과 크리스토프 코흐(Christof Koch: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가 내놓은 한 가설을 주목해 보자. 두 학자는 제안하기를 의식은 대뇌 피질의 어떤 진동으로부터 발생하며, 이 진동은 신경단위세포(뉴런; 신경원; 이하 뉴런으로 표기)가 1초에 40회 발화할 때 "동기화된다"고 한다.


◈ [옮긴이 주: "become synchronized"를 일단 "동기화되다"로 번역했습니다만, "동기화하다"로 번역하는 것이 옳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동기화(同期化) 자체에 될 화(化)라는 피동의 뜻이 있으므로, 우리말 피동 접미사 "되다"를 겹으로 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화되다"라는 말을 옳은 말로 당연시하고 폭넓게 쓰고 있는 실정이죠. 그 때문에 오히려 "동기화하다"라는 올바른 말이 일반적으로 통용되는 의미에서 좀 어긋나는 듯한 어감을 주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말 바로잡기를 작은 데서부터 실천하고자 한다면 앞으로 "~화하다"로 번역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당분간 저는 문맥을 봐 가면서 적절하게 혼용할 생각입니다.]


크릭과 코흐의 믿음에 따르면, 인지된 단일 대상의 다양한 특성들(예컨대, 인지된 대상의 색깔과 형태)은 두뇌의 여러 부위에서 처리되는데, 어떻게 해서 그것들이 하나의 통합된 전체로 변화되어 나타나는지를 그 현상이 설명해 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 이론에 따르면, 두 가지의 정보는 그것이 동기화한(동기화된) 신경 발화(neural firings)에 의해 표상되는 바로 그 순간에 한묶음으로 결합된다는 것이다.


이 가설은 아마도, 어떻게 해서 정보가 두뇌 속에서 통합되는지에 관한 "쉬운 문제" 중 하나를 해명해 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비록 (두뇌에서) 대량의 정보 통합이 진행된다고는 하지만, 과연 왜 동기화된 진동이 시각적 경험을 야기하는 것일까?


이 물음에는 크릭과 코흐의 이론이 아무것도 제공하지 못하는 "어려운 문제"가 포함되어 있다. 사실상, 크릭과 코흐 또한 어려운 문제가 과학에 의해 풀릴 수 있을 것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이와 같은 비판은 의식에 관한 최근의 거의 모든 연구에 통할 수 있다. 철학자 대니얼 씨. 데닛은 자신의 저서 『데닛, 의식을 설명하다; Consciousness Explained』에서, 어떻게 해서 두뇌 속의 수많은 독립적인 처리과정이 한데 결합되어, 인지된 사건에 대해 하나의 통합된 반응을 산출하는지, 그에 관한 정교한 이론을 펼쳐 보였다. 데닛의 이론은 우리가 어떻게 해서 우리의 내부 상태를 말로 표현해내게 되는지 매우 잘 설명해 준다(내부 상태에 대한 구두 보고를 산출하게 되는지 잘 설명해 준다). 그러나 왜 도대체 이러한 말함(reports; 보고) 속에 주관적 경험이 스며 있는지 거의 설명해 주는 바가 없다. 다른 환원주의적 이론과 마찬가지로, 데닛의 이론 또한 쉬운 문제에 국한된 이론인 것이다.


이같은 쉬운 문제들 사이의 핵심적인 공통 특징은, 그것들은 모두 "어떤 방식으로 인지 기능이나 행동적 기능이 수행되는가" 하는 문제를 다룬다는 점이다. 궁극적으로 그것들은 모두 두뇌가 일련의 과제를 수행하는 방식에 관한 물음으로 귀결된다. 다시 말해, 어떻게 두뇌가 자극들을 구별하고, 정보를 통합하며, 말함(reports; 보고)을 산출하는가 하는 등등의 물음들인 것이다. 만약 신경생물학자들이 부위별 고유의 신경 작용 원리(appropriate neural mechanisms; 부위별 신경기제)를 분석 기술해내어, 어떻게 그 기능들이 수행되는지 밝혀낸다면, 마침내 쉬운 문제는 풀릴 것이다.


반면에, "어려운 문제"는 어떻게 기능들이 수행되는가 하는 문제들을 넘어선다. 설령 의식과 관련된 모든 행동적 인지적인 기능이 해명된다 하더라도, 밝혀지지 않은 신비가 여전히 남아 있게 될 것이다. 왜 이러한 기능의 수행에 의식적인 경험이 동반하는 것일까? 이 물음이 바로 어려운 문제를 어렵게 만드는 또 하나의 수수께끼인 것이다.


설명적 빈틈 (The Explanatory Gap; 설명적 틈, 설명적 간격, 설명적 간극)


누군가가 제안하기를, 우리가 어려운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새로운 물리적 설명의 도구를 동원해야 한다고 말한다. 이를테면 비선형 동역학이나 신경과학 상의 새로운 발견 혹은 양자역학을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발상도 똑같은 어려움에 빠진다. 애리조나 대학의 스튜어트 알. 해머로프(Stuart R. Hameroff)와 옥스포드 대학의 로저 펜로즈(Roger Penrose)가 내놓은 제안을 살펴보자.


두 학자는 의식이 뉴런 속의 단백질 구조체, 즉 미세관(microtubules)에서 일어나는 양자-물리적 작용으로부터 발생한다고 주장한다. 해머로프와 펜로즈가 제안했듯이, 이러한 가설이 어떻게 두뇌가 결정을 내리는가에 대한 설명이나, 심지어 어떻게 수학적 정리를 증명하는가에 대한 설명을 제공할 수도 있으리라(그럴 것 같지는 않지만).


그러나 설령 그렇다 할지라도, 이 이론은 어떻게 양자-물리적 작용이 의식적 경험을 야기하는지에 관해선 침묵한다. 역시 예의 동일한 문제가, 단지 물리적 작용에만 바탕을 둔 의식 이론에는 그것이 무엇이든 예외없이 따라붙는 것이다.


물리적 이론이 지닌 난점은 오히려, 체계가 어떤 일정한 구조를 지니는 이유와 그 체계가 다양한 기능을 수행하는 방식을 설명하는 데에는 아주 적합하다는 사실에 있다. 과학이 지니는 대부분의 문제는 이런 형태를 띤다. 예컨대 우리가 생명을 설명하기 위해서는, 그 어떤 방식으로 물리적 체계가 생식하고, 적응하고, 신진대사를 하는지 기술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의식이란 완전히 다른 유형의 문제다. 왜냐 하면 의식은 구조와 기능에 대한 과학적 설명을 넘어서기(초월하기) 때문이다.


물론, 신경과학이 의식 연구와 관계가 없다는 얘기가 아니다. 일례로, 신경과학은 의식의 신경 상관자(neural correlate of consciousness)의 특성, 즉 의식적 경험과 직접적으로 관련을 맺고 있는 두뇌 작용을 밝혀낼 수 있으리라. 더 나아가서 두뇌 속의 유형별 작용(specific processes; 유형별 처리과정) 사이에 나타나는 상세한 상호작용(correspondence; 상호관계, 상호대응)과 의식적 경험의 관련 구성인자(components)까지 밝혀 줄 수 있으리라.


그러나 왜 이러한 작용들이 의식적 경험을 야기하는지, 이에 대해서 조금이라도 알기 전까지는, 우리는 철학자 조셉 레빈(Joseph Levine)이 말하는 물리적 작용과 의식 사이에 벌어져 있는 "설명적 빈틈"(explanatory gap)을 결코 가로지르지는 못할 것이다. 그 빈틈을 뛰어넘기 위해서는 새로운 유형의 이론이 필수적이리라.


대안적 이론을 찾기 위해서는, 과학에 나타나는 모든 실체(entities)가 그보다 더 근본적인 실체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핵심적으로 인식해야 한다. 예컨대 물리학에서는, 그 무엇보다도 특히 시간과 공간, 질량, 그리고 전하가 우주의 근본적 요소로 간주된다. 즉 그것들은 그보다 더 단순한 것으로는 환원되지 않는다. 그러나 이러한 환원불가능성(irreducibility; 불가환원성)에도 불구하고, 상세하고 유용한 이론에서는 이들 실체를 근본적 법칙을 통해 서로 결부시킨다. 이러한 요소들과 법칙들을 한데 묶어 복잡미묘한 현상의 엄청난 다양성을 설명할 수 있는 것이다.


널리 인정되는 바와 같이 물리학은 우주의 근본적 요소와 법칙에 관한 완전한 목록을 제공한다. 물리학자 스티븐 와인버그(Steven Weinberg)가 자신의 1992년 저서 『꿈의 궁극 이론; Dreams of a Final Theory』에서 말했듯이, 물리학의 목표는 "모든 것의 이론"(theory of everything; 만물의 이론)에 있다. 우주에 관해 알아야 할 모든 것을 여기에서 도출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와인버그는 의식에서 문제가 드러남을 인정한다. 물리학 이론의 힘(위력)에도 불구하고, 의식의 존재는 물리적 법칙에서 도출될 수 없을 것 같다. 와인버그는 물리학으로써 자신이 의식의 객관적 상관자(즉, 신경 상관자)라고 부른 것을 궁극에 가서는 설명할 수 있으리라고 논증하면서 물리학을 옹호한다. 그러나 물론, 그것이 의식 자체를 설명하는 것은 아니다. 만일 의식의 존재가 물리적 법칙에서 도출되지 않는다면, 물리학 이론은 참된(진정한) 모든 것의 이론이 되지 못하리라. 따라서 궁극 이론은 반드시 또다른 근본적 구성요소를 포함해야만 한다.


참된 모든 것의 이론 (A True Theory of Everything)


이같은 목적을 위해, 나는 의식적 경험을 그보다 더 근본적인 어떤 것으로도 환원할 수 없는 근본적 요소로 여길 것을 제안한다. 이런 발상은 처음엔 매우 기이하게 보이리라. 그러나 논리적 일관성을 위해선 필수적인 듯하다. 19세기에 전자기적 현상은 그 이전에 이미 알려진 원리로써는 설명할 수 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당연한 귀결이지만, 과학자들은 전자기적 전하를 새로운 근본적 실체로 받아들이고 그와 관련된 근본적 법칙을 연구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추론을 의식에도 적용해야 한다. 기존의 근본적 법칙들이 의식을 수용하지 못할 경우, 새로운 이론이 마땅히 나와야만 한다.


근본적 속성이 있는 곳에, 근본적 법칙이 있다. 여기서의 경우, 이 근본적 법칙은 경험(의식적 경험을 말한다-옮긴이)을 물리(학)적 이론의 기본요소(elements)로 끌어들여야만 한다. 이 법칙은 물리계(physical world)의 법칙들과 아마도 전혀 상충하지 않을 것이다. 이 법칙은 그것 자체의 설명력으로써 닫힌 계(closed system)를 이룰 것이다.


더 나아가 이 법칙은 하나의 교량(다리)으로 기능할 것이며, 따라서 어떻게 경험이 기초적인 물리적 작용에 의존하는지를 상술해 줄 것이다. 바로 이 법칙이 설명적 빈틈 사이를 연결해 줄 다리인 것이다.


이에 따라서, 완전 이론은 두 가지 구성요소를 갖추게 될 것이다. 즉 그 하나는 물리적 법칙으로서 미시 체계에서부터 우주적 거시 체계에까지 이르는 모든 물리적 체계의 행동(behavior; 운동)을 해명해 줄 것이며, 다른 하나는 심물 법칙(psychophysical laws)이라 부르는 것으로서 어떻게 일련의 심물 체계가 의식적 경험과 관련을 맺는지 해명해 줄 것이다. 결국 이 두 구성요소가 결합되어 참다운 모든 것의 이론을 형성할 것이다.


새 이론을 찾아서 (Searching for a Theory)


그런데 잠깐, 우리가 그 법칙들이 존재한다고 가정은 했지만, 과연 우리가 그 심물 법칙의 실체를 밝혀낼 수 있을까? 이 탐구 과정에서 최대의 걸림돌은 바로 자료(data)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이미 내가 기술했듯이, 의식은 주관적이다. 그러므로 다른 사람이 지닌 의식을 그것 자체로 고스란히 확인할 방도란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난점은 하나의 장애물일 뿐이지, 막다른 골목은 아니다.


첫 단계로서, 우리 각자는 자기 자신의 경험에 쉽게 접근할 수 있다. 자기 자신의 경험이야말로 새로운 이론을 만들어 나가는 데 꼭 필요한 풍요로운 보고다. 우리는 또한 다른 주체(subjects; 피험자)가 자신의 경험에 관해 기술하는 간접적 정보에 얼마든지 의존할 수 있다.


철학적 논증과 사고실험 역시 여기에 기여한다. 이같은 방법들이 한계가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나 첫걸음을 떼기엔 충분하고도 남는다.


물론 이들 이론을 확정적으로 검증하기란 쉽지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종래의 과학적 학문분과에 비해 사변적(추상적) 측면이 강하다는 점은 불가피하다. 하지만 그런 사변성에도 불구하고 이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은, 새 이론들이 다른 주체들의 보고에서 나오는 증거는 물론이고 우리 자신의 일인칭 경험을 반드시 정확하게 해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사실이다.


만일 우리가 동등한 단순성(simplicity; 이론적 간결성)을 지닌 여타의 이론보다 자료에 더욱 잘 들어맞는 한 이론을 찾아낸다면, 우리는 그것을 얼마든지 채택할 수 있다. 그러나 지금 이 순간, 우리에게는 자료에 딱 들어맞는 이론이란 단 한 가지도 없는 실정이다. 따라서 검증가능성에 대한 우려는 아직 때가 이르다.


우리는 물리적 처리과정(physical processes; 물리적 작용)을 일상적 수준의 (의식적) 경험에 연결짓는 상위 수준의 교량 법칙(high-level bridging laws)을 탐구함으로써 시작할 수 있다. 그러한 교량 법칙의 기본적 얼개는 다음과 같은 관찰로부터 하나 둘씩 자료를 구해 그려나갈 수 있다. 즉 우리가 어떤 것을 의식할 때, 우리는 일반적으로 그것에 대해 행동할 수도 있으며, 그것에 관해 말할 수도 있다. 바로 이때의 행동과 말하기가 객관적인 기능이자 물리적인 기능이라는 얘기다.


이와는 반대로, 어떤 정보가 행동과 말하기(speech; 발화)에 직접적으로 유용하게 쓰일 때, 그것은 일반적으로 의식적이다. 이와 같이, 의식은 우리가 "자각"(awareness; 감지)이라고 부르는 것과 아주 밀접한 상관관계를 맺고 있다. 다시 말해 자각이라는 처리과정에 의해 두뇌 속의 정보가 총체적으로 유용하게 쓰이는 결과로써 말하기(speech; 발화)와 신체적 행동과 같은 작용들이 산출되는 것이다.


객관적 자각(감지) (Objective Awareness)


이 개념은 (언뜻 보기에 의식과의 개념 차이가 뚜렷하게 드러나지 않는 것 같아, 그게 그거 아니냐는 의미에서) 사소해 보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에서 정의했듯이, 자각이란 객관적이면서 물리적이다. 반면에 의식은 그렇지 않다. 여기에서 자각의 개념 정의를 좀더 정교하게 가다듬을 필요가 있는데, 그것은 자각의 개념을 말을 할 줄 모르는 유아나 동물에까지 확대 적용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적어도 낯익은 경우에서는, 심물 법칙의 윤곽을 거칠게나마 충분히 그려볼 수 있다. 즉 자각이 있는 곳에는 의식이 있으며, 그 역도 또한 마찬가지다.


이러한 추론의 기조를 한 발 더 밀고나가기 위해 의식적 경험에 내재하는 구조(structure)를 살펴보자. 예컨대, 시야(field of vision)에 잡히는 경험은 색깔(colors)과 형태(shapes)와 무늬(patterns)가 시시각각 변화하는 짜맞춤그림(모자이크)이다. 즉 시야에 들어오는 경험은 모자이크처럼 세세한 기하학적 구조를 지닌다.


우리는 이 구조를 (직접 말로, 글로, 그림으로, 혹은 마음 속에 떠올림으로써) 기술하고 묘사해낼 수 있으며, 이 구조의 구성성분 중 다수를 향해 접근할 수도 있고, 이 구조에 의존해서 다른 행동을 수행할 수도 있다. 이같은 사실이 암시하는 바는 이 구조가, 객관적 자각의 신경 처리과정을 통해 두뇌에서 유용하게 쓰이는 정보의 구조와 직접적으로 상호대응한다는 점이다.


이와 비슷하게, 우리의 색깔 경험은 내재적인 3차원 구조(intrinsic three-dimensional structure)를 지닌다. 이 3차원 구조는 두뇌의 시각 피질 속 정보 처리과정의 구조에 반영되어 나타난다. 이 구조는 화가들이 사용하는 색원판(color wheel)과 색상표(color charts)를 보기로 들어 설명할 수 있다. 색원판과 색상표에는 색깔들이 체계적인 양식으로 배열되어 있다. 이를테면, 한 축에는 빨강에서 초록까지, 다른 축에는 파랑에서 노랑까지, 세 번째 축에는 까망에서 하양까지 체계적 배열을 이루고 있다.


색원판에 서로 인접해 있는 색깔들은 상호유사한 색깔로 경험된다(보인다). 이때 거의 확실해 보이는 사실은 이 색깔들 역시 두뇌 속의 상호유사한 지각적 표상들(perceptual representations)과 체계적으로 상호대응한다는 점이다. 이 두뇌의 지각적 표상은 아직은 그 전모가 밝혀지지 않은, 뉴런들 사이에 형성되는 복합적 3차원 부호 체계(system of complex three-dimensional coding)의 한 부분일 것이다.


이제 우리는 기초적 개념을 구조적 상호일치의 원리(principle of structural coherence)에 따라 재정의할 수 있다. 즉 의식적 경험의 구조는 자각할 때의 정보 구조에 반영되어 나타나며, 그 역도 또한 마찬가지다.


또다른 심물 법칙의 후보는 조직적 불변성의 원리(principle of organizational invariance)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일한 핵심적 조직을 갖춘 물리적 체계는 그 물리적 체계의 구성성분이 무엇이든지 간에 동일한 유형의 의식적 경험을 야기한다는 것이다. 예를 들면, 만일 인간의 두뇌 속 뉴런 사이의 상세한 상호작용이 실리콘 반도체로 복제된다면, 거기에도 동일한 의식적 경험이 야기된다는 것이다. 이같은 발상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 그러나 나는 뉴런을 실리콘 반도체로 점진적으로 대체해 나가는 사고실험을 보임으로써 이 주장을 설득력있게 옹호할 수 있다고 믿는다. 이 주장의 놀라운 함축은 바로 기계도 언젠가는 의식을 지니게 된다는 것이다.


의식 이론의 궁극적 목표는 간결하면서도 우아한 근본적 법칙의 조합, 즉 물리학의 근본적 법칙과 유사한 법칙에 있다. 하지만, 위에서 기술한 원리들은 근본적으로 보이지는 않는 것 같다. 오히려 열역학이나 운동학(kinematics)의 거시적 원리들과 같은 물리학의 거시적 원리와 유사한 상위 수준의 심물 법칙처럼 보인다. 과연 기초적인 근본적 법칙이란 무엇인가? 그 아무도 모르지만, 나는 감히 상상해 본다.


나는 제1의 심물 법칙은 정보 개념(concept of information)을 핵심적으로 포함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1940년대에 매사추세츠 공과대학의 클로드 이. 섀넌(Claude E. Shannon)이 내놓은 정보의 핵심적 개념에 따르면, 정보란 상호간에 유사점과 차이점이 드러나는 기본적 구조를 지닌, 개별적 상태들의 한 집합을 의미한다(a set of separate states with a basic structure of similarities and differences between them).


예컨대, 우리는 하나의 정보 상태(information state)로서 10비트로 된 2진 부호를 생각할 수 있다. 이런 정보 상태들은 물리계(physical world) 속에 구현될 수 있다. 이같은 구현은 정보 상태들이 물리적 상태와(일례로 전압과 같은 상태와) 상호대응할 때는 그 어느 때나 발생하며, 그때 그들 사이의 차이점은 전화선과 같은 전송로를 통해서 전달될 수 있다.


정보: 물리적인 것과 경험적인 것(Information: Physical and Experiential; 물리적인 정보와 경험적인 정보)


의식적 경험 속에도 역시 정보가 구현된다. 예를 들면, 시야에 잡힌 알록달록한 색깔의 천조각 무늬는 컴퓨터 화면에 촘촘히 덮혀 있는 화소들(pixels)의 무늬와 유사하다. 흥미롭게도 여기에서 드러나는 사실은, 동일한 정보 상태가 의식적 경험에도 개재되며, 또한 두뇌 속의 기초적인 물리적 처리과정(physical processes; 물리적 작용)에도 개재된다는 사실이다.


예컨대, 색깔 공간의 3차원 부호화가 암시하는 바는 색깔 경험의 정보 상태는 두뇌 속의 정보 상태와 직접적으로 상호대응한다는 사실이다. 따라서, 우리는 이같은 두 가지 상태를, 물리적 처리과정과 의식적 경험 양쪽에 동시로 구현되는, 단일한 정보 상태의 개별적 측면으로 간주할 수 있다.


여기에서 자연스러운 가설이 도출된다. 즉 정보는, 적어도 일부의 정보는, 두 가지 기본적 측면을 지니게 된다. 바로 물리적 측면과 경험적 측면이다.


이 가설은 물리적 처리과정과 경험 간의 관계를 뒷받침해 주는 근본적 원리(fundamental principle)의 지위를 얻는다. 우리의 의식적 경험이 있는 곳에는 그 어디에나, 의식적 경험이 정보 상태의 한 측면으로서 존재하며, 두뇌 속의 물리적 처리과정에는 정보의 또다른 한 측면이 구현된다.


이 제안이 만족스러운 이론이 되기 위해서는 구체적 논거가 더 필요하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언급한 원리들과 매우 잘 들어맞으며(예컨대, 동일한 조직을 지닌 체계는 동일한 정보를 구현한다는 원리), 우리의 의식적 경험의 수많은 특징을 아주 잘 설명해 줄 수 있다.


적어도 이 발상은 다른 여러 제안들과 훌륭한 조화를 이룬다. 이를테면, 정보가 우주물리학(physics of the universe)에 근본적이라는 잔 에이. 휠러(John A. Wheeler)의 제안과 잘 양립한다. 물리학의 법칙은 아마도 궁극적으로는 정보 개념들로 구성될 수 있을 것이다. 이 경우에 우리는 물리 법칙과 심물 법칙 양자의 구성요소들(constructs)을 만족스럽게 일치시킬 수 있을 것이다.


◈ [잔 에이. 휠러(John Archibald Wheeler)의 한글 표기에 대해 : 잔 휠러는 1911년 7월 9일에 미국 플로리다 주의 잭슨빌(Jacksonville, Fla.)에서 태어난 미국인입니다. 따라서 "John"을 영국식 발음인 "존"으로 하지 않고 미국식 발음에 가까운 "좐"이나 "잔"으로 표기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당분간 편의상 "잔"으로 하겠습니다. 저는 인명 표기를 할 때, 해당 인물의 출생국 발음이나 국적지 발음에 준해서 표기해 주는 것을 원칙으로 합니다. 현행 한글 맞춤법의 외국어 한글 표기나 외래어 표기 규정에는 그 원칙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며, 관련 규정을 준용한다 하더라도 그 원천부터가 무원칙의 뒤죽박죽이라, 따르기가 어렵다고 저는 판단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마침내 물리학 이론과 의식 이론이 통합되어 단일한 대통일 정보 이론(grander theory of information)이 탄생할 것이다.


경험은 편재하는가? (Is Experience Ubiquitous?)


정보의 편재성(ubibiquity)에서 잠재적인 문제가 발생할 수도 있다. 예컨대, 심지어 자동온도조절기(thermostat)까지 정보를 구현한다고 볼 수 있는데, 그렇다면 그것이 의식적이란 말인가? 여기엔 적어도 두 가지 대답이 가능하다.


첫째, 우리는 근본적 법칙에 제약을 두어 오직 일부의 정보만이 경험적 측면을 지닌다고 대답할 수 있다. 그것은 아마도 물리적으로 처리되는 방식에 의존할 것이다.


둘째, 우리는 과감하게 밀고나가 대답하기를 모든 정보가 경험적 측면을 지닌다고 주장할 수 있다. 즉 복합적 정보 처리가 존재하는 곳에는 복합적 경험이 존재하며, 단순한 정보 처리가 존재하는 곳에는 단순한 경험이 존재한다. 만일 그렇다면, 자동온도조절기까지 경험을 지닐 것이다. 비록 그 경험이 아주 기본적인 색깔 경험보다 훨씬 더 단순하고, 감정이나 생각을 전혀 동반하지 않을 것이지만 말이다.


처음 느낌엔 이것이 기이하리라. 그러나 만일 경험이 정말 근본적이라면, 우리는 그것이 도처에 존재하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어느 경우에서건, 이 대안들 사이의 선택은 어느 것이 가장 강력한 이론으로 통합될 수 있느냐에 달려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런 발상은 터무니없는 얘기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른 한편, 두뇌 속 물리적 작용으로부터 의식적 경험의 정확한 구조를 예측해내는 매우 강력한 제안으로 발전해나갈 수도 있다. 만일 이 기획이 성공한다면, 우리는 이 이론을 당연히 채택할 것이다. 만약 실패한다면, 또다른 길을 모색해 대안적인 근본적 이론을 개발해 나가야 한다. 이런 노력을 계속 기울여 나간다면, 우리는 언젠가 마침내 마음의 최대 신비를 풀어낼 수 있으리라.



◈ [원문 출처]


Chalmers, David J. (1995), "The Puzzle of Conscious Experience", 『Scientific American』 December 1995: pp. 62-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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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어만 할 수 있는 내가 완벽한 문법책과 한-중 단어집을 가지고 커튼 너머에서 들려오는 중국인의 질문에 완벽하게 답함으로써 내가 중국말을 이해하고 있다고 질문자를 설득시킬 수 있다고 해서 내가 실제로 중국어를 이해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자연 속에서, 우리 자신 속에서 관찰하는 것들은 그것들의 ‘기능’뿐이다. 뉴런들의 네트워킹(전기신호의 on-off) 속에서 우리는 우리의 감각, 사고, 인지기능에 관한 모든 기능적 장치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능은 겉으로 드러난 현상일 뿐이다. 그 뒤에서, 내가 완벽한 문법책을 가지고 중국인을 속이고 있는 것과 같은,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말이좋아 뉴럴테느워킹이지 우리는 뉴런들의 발화를 톱니바퀴나 지레등의 눈에보이는 단순한 장치들로도 기능적으로 같은 일을 수행할 수 있게끔 장치를 꾸밀 수 있다(물론 현실적이진 않지만 사고실험을 할 수는 있겠다). 실제로 우리 뇌가, 어마어마하게 복잡하고 거대하겠지만, 톱니바퀴 또는 지렛대의 조합으로 대체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많은 뇌과학자들의 뇌의 기능을 속속들이 밣혀가고 있고 그럴수록 유물론이 진실인것처럼 이야기되지만, 이는 단지 예전의 생기론자나 물활론자들에 대한 반감에서 비롯된 오해일 뿐이다. (생기론자들이나 물활론자들 역시 주로 우리의 감정이나 사고의 기능을 밝히기 위해서 생기 등을 가정했을 뿐이며 이런 의미에서 이 생기론자들은 모두 실패했다.)우리의 과학자들은 뇌의 ‘기능’을 밝혔을 뿐이다. 다섯 번째 톱니바퀴와 여섯 번째 톱니바퀴가 서로 맞물려 돌아가면 철수는 영희에게 호감을 느끼게 된다고 하더라. 단지 둘의 현상적인 상관관계를 밝혀놓는 일이 그들이 하는 일의 전부이다. 우리의 '경험'은 어디로 갔을까.

 

우리의 경험과 감각 자체가 톱니바퀴의 맞물려 돌어감으로 생각하는 것이 주는 어색함은 단지 뇌가만들어 낸 한계일 뿐인가. 우리는 오직 가시광만을 감각할 수 있다. 우리는 자외선의 색깔을 상상조차 할 수 없다. 둘(톱니바퀴에서 마음을 떠올릴 수 없다는 것과 머릿속에 자외선을 상상할 수 없다는 것) 모두 선험적으로 자명하고 확고하다. 둘 모두 스스로를 부정해도 논리적 모순이 생기지 않으므로 종합적인 지식이다. 아무리 자외선을 상상해보려해도 가시광선만이 머릿속에 그려지듯, 톱니바퀴에서 아무리 마음 자체를 보려해도 그것은 상상의 한계를 애초에 넘어선 것이기에 어색함을 주는 것일 뿐인가. 나의 첫번째 질문은 과연 그가 말하는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애초에 '말이 되는가?' 하는 점이다(물론 차머스의 문제인식은, 이런 경험에 대한 모든 것들이 뇌의 기능적 장치속에 구현되어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경험이라는 1인칭시점의 문제를 풀리지 않은 것으로 간주한다. )인과율에 관한 지식 역시 칸트에 의하면 선험적이고 종합적인 것인데, 인과율이 갖는 과학에서의 중요한 위치는 이것이 우리의 두뇌의 기능과는 무관하다고 믿게 만든다. 반면 위에 언급된 두가지 것들은 진실이라 믿을 근거가 똑같이 부족하다고 봐야하나.

 

또는 - 이는 아마 데이비드 차머스의 주장에 가까울텐데 - 이원론을 받아들여, 물리적 현상과 같이 일어나지만, 상호작용 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의식'자체를 근본적인 어떤 것으로 가정해야 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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